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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슈/사회

선한 영향력의 아이콘, 김장하 선생의 숨겨진 기부 스토리와 그가 남긴 유산

by Agent 2025. 4. 19.

여러분, 혹시 주변에 도움이 필요한 이들을 위해 자신의 재산을 아낌없이 내어주는 사람을 본 적이 있나요? 누군가에게 도움을 받았을 때 그 따뜻함이 평생 기억에 남지 않나요? 오늘 소개할 김장하 선생님은 평생 베풂을 실천하며 수많은 사람들의 인생에 선한 영향력을 남긴 진정한 어른입니다. 그의 이야기를 들으면 우리 사회에 아직 희망이 있다는 것을 느끼게 될 거예요.

문화방송(MBC) 경남이 2023년 방영한 2부작 다큐멘터리 ‘어른 김장하’. 엠비시 경남 제공
문화방송(MBC) 경남이 2023년 방영한 2부작 다큐멘터리 ‘어른 김장하’. 엠비시 경남 제공

한약방 주인에서 천사 기부자로: 김장하 선생의 놀라운 삶

경남 진주의 작은 한약방에서 시작된 기적

김장하 선생님은 경남 진주시 동성동에서 '남성당 한약방'을 60년 동안 운영했습니다^3. 평범한 한약방 주인처럼 보이지만, 그의 삶은 결코 평범하지 않았죠. 한약방에서 번 돈으로 100억원이 넘는 금액을 수십 년간 끊임없이 지역사회에 환원했기 때문입니다^3.

"돈이라는 게 똥하고 똑같아서 모아놓으면 악취가 진동하는데 밭에 골고루 뿌려 놓으면 좋은 거름이 된다."라는 그의 철학은 단순하지만 깊은 지혜를 담고 있습니다^3. 많은 부자들이 재산을 쌓아두고 과시하는 시대에, 김장하 선생님은 정반대의 길을 걸었습니다.

김장하 선생님이 지역사회에 환원한 방식은 정말 다양했습니다. 학교를 세우고, 장학금을 지급하고, 인권 운동을 후원하고, 문화예술을 지원했죠. 더 놀라운 건 이 모든 일을 자신의 이름을 숨기고 조용히 진행했다는 점입니다^3.

겸손함과 낮은 자세로 일관한 삶

김장하 선생님은 항상 테이블의 끄트머리, ㄴ자 모서리 자리에 앉는 것을 고집했습니다^3. 사람들이 중앙으로 모시려 해도 한사코 사양하며 구석진 자리를 선택했죠. 이런 작은 행동 하나에서도 그의 겸손함과 낮은 자세를 엿볼 수 있습니다.

그는 자신의 선행이 알려지는 것을 극도로 꺼렸습니다. 기부를 하고도 이름을 숨겼고, 인터뷰는 단칼에 거절했습니다^3. 그래서 그의 선행은 오랫동안 제대로 알려지지 않았습니다. '무주상보시(無主相布施)', 즉 내가 내 것을 누구에게 주었다는 생각조차 버리는 삶의 방식이었습니다^3.

김장하 선생님은 말합니다. "세상의 병든 이들, 누구보다 불행한 사람들에게 거둔 이윤이기에 자신을 위해 써선 안 되겠다는 생각이다"^4. 한약방에서 번 돈이 아픈 사람들로부터 왔으니 그 돈은 다시 사회로 환원해야 한다는 그의 신념이 엿보이는 말이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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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장하 선생이 남긴 사회적 유산들

명신고등학교 설립과 기부

김장하 선생님은 39살이던 1983년 진주에 명신고등학교를 설립했습니다^1. 더 놀라운 것은 1991년 이 학교를 국가에 아무 조건 없이 헌납했다는 점입니다^1. 많은 사람들이 자신의 이름을 걸고 학교를 설립하는 것과 달리, 김장하 선생님은 학교를 설립한 후 국가에 내어주는 선택을 했습니다.

명신고등학교 설립 과정에서도 그의 원칙은 명확했습니다. 첫째, 자신의 친척은 한 명도 채용하지 않겠다. 둘째, 돈을 받고 한 사람도 채용하지 않겠다. 셋째, 권력에 굽히지 않겠다^3. 이런 원칙 때문에 정치권으로부터 압력을 받기도 했습니다. 한 국회의원이 특정 교사를 신경써달라고 청탁했을 때, 김장하 선생님은 그 교사의 채용을 무효화시켰습니다^3.

이러한 강직한 태도 때문에 세무조사와 교육부 감사가 내려왔지만, 김장하 선생님은 "그리 나오면 나는 오히려 쉬워요"라고 대응했습니다^3. 잘못한 것이 없어서 두려울 것이 없었기 때문이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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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00명 넘는 '김장하 키즈'의 탄생

김장하 선생님은 1,000명이 넘는 학생들에게 장학금을 지원했습니다^1. 형편이 어려운 학생들에게 등록금은 물론 하숙비와 생활비까지 남몰래 지원했죠^3. 놀라운 점은 그가 어떠한 흔적도 남기지 않으려 했다는 것입니다.

이렇게 김장하 선생님의 도움을 받은 사람들 중에는 헌법재판소 문형배 소장 권한대행도 있습니다. 문 권한대행은 1965년 경남 하동군에서 가난한 농부의 장남으로 태어나 고등학교 2학년 때 김장하 선생님을 만나 대학교 4학년까지 장학금을 받았습니다^2. 2019년 헌법재판관 인사청문회에서 그는 "김장하 선생으로부터 받은 바를 사회에 갚기 위해 전력을 다했다"고 말했습니다^2.

또 다른 '김장하 키즈'로는 2014년 이경규의 '양심냉장고' 프로그램에 등장했던 주인공도 있었습니다. 증권사에서 일하는 김종명 씨는 명신고등학교 7회 졸업생이자 김장하 선생님으로부터 장학금을 받은 인물입니다^1. 그는 횡단보도에서 빨간불에 정지하는 모습으로 화제가 되었는데, 이런 준법정신이 김장하 선생님의 영향을 받았음을 엿볼 수 있습니다.

ChatGPT 지브리스타일로 그려본 김장하선생
ChatGPT 지브리스타일로 그려본 김장하선생

사회적 약자를 위한 끊임없는 지원

여성 인권과 가정폭력 피해자 지원

김장하 선생님은 당시로서는 생소했던 여성 인권 증진에도 앞장섰습니다. 여성 인권이라는 개념조차 제대로 작동하지 않았던 시대에 진주가정폭력상담소를 후원했으며 호주제 폐지 운동에도 힘을 보탰습니다^3.

여성단체가 공개한 세월의 흔적이 묻은 사진 속에는 여성 회원들과 캠페인을 벌이고 있는 중년의 김장하 선생님이 담겨있습니다. 그는 그 자리에서 유일한 남성이었죠^3. 이처럼 그의 관심은 사회적 약자들에게 항상 열려있었습니다.

차별과 싸운 용기 있는 활동가

김장하 선생님은 형평운동기념사업회를 만들어 30년간 이끌어 왔습니다^4. 형평운동은 백정들의 신분해방운동으로, 사회적 차별에 맞서 싸운 중요한 인권운동이었습니다. 그는 진주 형평운동의 선구자 강상호의 묘에 비석을 세우는 비용을 후원하기도 했는데, 당시 익명의 '작은 시민'으로 기부했다는 사실이 나중에야 밝혀졌습니다^3.

김장하 선생님은 형평운동기념사업회 30주년을 맞이한 자리에서 "새로운 차별을 없애자 이런 쪽으로 추진했었는데 30년이 지난 오늘 와서 그 차별은 별로 없어지지도 않고 그대로 유지되는 것 같아서 안타깝습니다"라고 말했습니다^4. 그의 말에서 사회적 차별과 불평등에 대한 진심 어린 고민을 느낄 수 있습니다.

문형배 헌법재판소장 권한대행(왼쪽)이 지난 4일 헌법재판소 대심판정에서 윤석열 전 대통령 탄핵심판 인용 결정을 선고한 뒤 김형두 재판관 등을 두드리며 대심판정을 나서고 있다. 사진공동취재단
문형배 헌법재판소장 권한대행(왼쪽)이 지난 4일 헌법재판소 대심판정에서 윤석열 전 대통령 탄핵심판 인용 결정을 선고한 뒤 김형두 재판관 등을 두드리며 대심판정을 나서고 있다. 사진공동취재단

어른 김장하, 그의 이야기가 퍼져가는 방식

조용히 살고 싶었지만 빛을 발한 삶

김장하 선생님은 자신의 선행이 알려지는 것을 원하지 않았습니다. 하지만 그의 이야기는 경남 MBC의 다큐멘터리 <어른 김장하>를 통해 세상에 알려지게 되었습니다^3. 김주완 전 경남도민일보 기자와 김현지 PD(MBC경남)가 제작한 이 다큐멘터리는 방영 직후 입소문을 타며 큰 반향을 일으켰습니다^3.

흥미로운 점은 김장하 선생님이 이 다큐멘터리 취재를 허락한 적이 없다는 것입니다^3. 그럼에도 불구하고 제작진은 선생님의 주변 인물 100여 명을 만나 그의 삶을 증언해줄 이야기를 모았습니다. 김주완 기자는 이토록 많은 이로부터 적극적인 취재 협조를 받은 적은 없었다고 회고했습니다^3.

이 다큐멘터리는 이후 넷플릭스를 통해 릴리스되면서 더 많은 사람들에게 김장하 선생님의 삶이 알려지게 되었습니다^3. 2025년 4월 윤석열 전 대통령 파면 판결과 관련해 문형배 헌재소장 권한대행이 김장하 선생님의 장학생이라는 사실이 알려지면서 <어른 김장하> 다큐멘터리는 극장에서 재개봉되기도 했습니다^1.

삶의 지표가 된 한 사람의 영향력

김장하 선생님을 증언하는 사람들의 공통된 인상은 '선생님 앞에 부끄러운 사람이 되지 않기 위해 애쓰고 있다'는 점이었습니다^3. 서울대 이준호 교수는 "선생님이 어떤 지침을 주는 게 아니라, 그냥 살아오신 그 과정 자체가 삶의 지표 같은 분"이라고 말했습니다^3.

그의 삶은 주변 사람들에게 영감을 주었고, 더 나은 사람이 되도록 영향을 미쳤습니다. 김장하 선생님이 청와대를 방문했을 때의 일화도 있습니다. 당시 노무현 전 대통령의 보좌역이었던 김성진 씨는 "사람을 만나러 가면 항상 가르치고, 훈수 두고, 잘난 체 하고, 장광설을 늘어놓는 사람이 대부분인데 (고 노무현 전 대통령이) 너무 좋은 분을 만난 것 같다(고 말씀하셨습니다)"라고 전했습니다^4.

김장하 선생이 우리에게 가르쳐준 삶의 지혜

진정한 부(富)의 의미

김장하 선생님은 우리에게 진정한 부(富)가 무엇인지 가르쳐 줍니다. 그에게 돈은 목적이 아닌 수단이었습니다. "돈이라는 게 똥하고 똑같아서 모아놓으면 악취가 진동하는데 밭에 골고루 뿌려 놓으면 좋은 거름이 된다"라는 그의 말은 물질적 부보다 나눔의 가치가 더 중요하다는 메시지를 담고 있습니다^3.

여러분은 부자가 되고 싶으신가요? 그렇다면 어떤 부자가 되고 싶은지 생각해 보세요. 많은 재산을 쌓아두기만 하는 부자와 자신의 재산으로 세상을 더 나은 곳으로 만드는 부자, 어떤 삶이 더 가치 있을까요?

권력과 명예에 흔들리지 않는 원칙

김장하 선생님은 평생 권력과 명예에 흔들리지 않는 원칙을 지켰습니다. 그가 명신고등학교 설립 당시 내세운 세 가지 원칙 - 친척 한 명도 채용하지 않기, 돈으로 사람 채용하지 않기, 권력에 굽히지 않기 - 는 현대 사회에서도 큰 울림을 줍니다^3.

한 국회의원의 청탁에 굴하지 않아 세무조사와 교육부 감사를 받게 되었을 때도 그는 당당했습니다. "그리 나오면 나는 오히려 쉬워요"라고 말했던 그의 태도는 잘못한 것이 없을 때 오는 당당함이었습니다^3. "제일 내가 이 험한 세상 살아오면서 힘이 되었던 것은 비교적 깨끗하게 살아왔다는 거. 그게 하나의 큰 힘이 된 거죠."라는 그의 말에서 우리는 깨끗한 양심의 중요성을 배울 수 있습니다^3.

이것만 기억하세요: 평범한 선(善)의 힘

김장하 선생님이 가장 감동적인 이유는 그의 선행이 특별해서가 아니라, 오히려 평범하기 때문입니다. 누구나 할 수 있지만 아무나 하지 않는 일들을 묵묵히 실천했기 때문입니다. 한 장학생이 "제가 장학금을 받고도 특별한 인물이 못 돼서 죄송합니다"라고 말했을 때, 김장하 선생님은 이렇게 대답했습니다.

"그런 거를 바란 거는 아니었어. 우리 사회는 평범한 사람들이 지탱하고 있는 거다."^1

이 말에는 김장하 선생님의 철학이 담겨 있습니다. 세상을 바꾸는 것은 영웅적인 행동이 아니라, 평범한 사람들의 선한 행동들이 모여 이루어지는 것이라는 믿음입니다. 우리 모두가 자신의 자리에서 옳은 일을 하는 것, 그것이 바로 김장하 선생님이 우리에게 가르쳐준 가장 큰 지혜입니다.

김장하 선생님 같은 사람이 우리 사회에 더 많이 있다면, 그리고 우리 모두가 조금씩 그런 삶을 닮아간다면, 우리 사회는 얼마나 더 따뜻해질까요? 오늘부터 작은 실천을 시작해 보는 건 어떨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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