프랑스에서 태어나 한국의 농촌과 소외된 이들을 위해 일생을 바친 참된 목자가 있었습니다. 6·25 전쟁 직후 황폐화된 한국 땅에 발을 디딘 후 71년간 한국인들과 함께 웃고 울며 살아온 두봉(杜峰, René Dupont) 주교가 2025년 4월 10일, 96세의 나이로 우리 곁을 떠났습니다^3. 가난한 이들의 벗이자 농민 사목의 대부로 불렸던 그의 삶은 오늘날 우리에게 어떤 의미를 남겼을까요? 함께 그 발자취를 따라가 보겠습니다.
프랑스에서 한국으로, 희망의 씨앗을 심은 선교사
1929년 9월 2일, 프랑스 오를레앙의 독실한 가톨릭 신자 가정에서 3남 2녀 중 차남으로 태어난 르네 뒤퐁(René Dupont)은 어린 시절부터 남다른 신앙심을 품고 자랐습니다^4. 21세라는 젊은 나이에 파리외방전교회에 입회한 그는 로마 그레고리안 대학과 대학원에서 신학을 공부한 후 1953년 6월 사제품을 받았습니다^3.
그의 한국과의 인연은 1954년 12월, 한국전쟁의 상처가 채 아물지 않은 시기에 시작되었습니다^3. 대전 대흥동천주교회에서 10년간 보좌신부로 첫 사목활동을 시작한 그는 대전교구 학생회 지도신부, 가톨릭 노동청년회 지도신부, 대전교구청 상서국장, 파리외방전교회 한국지부장 등을 역임하며 한국 사회의 구석구석을 살폈습니다^1.
한국에 온 지 15년이 지난 1969년, 그의 삶에 큰 전환점이 찾아왔습니다. 교황 바오로 6세가 그를 초대 안동교구장으로 임명한 것입니다^3. 하지만 두봉 신부는 "외국인 사제가 할 일은 한국인 신자들의 뒷바라지일 뿐 교구장 자리를 차지할 수 없다"며 완강히 고사했습니다^2. 결국 교황청의 뜻에 따라 1969년 9월 25일 주교 서품을 받고 안동교구를 이끌게 되었지만, 그의 겸손함과 섬김의 자세는 시작부터 남달랐습니다.
우리가 몰랐던 두봉 주교의 초기 한국 생활
두봉 주교는 한국어를 배우는 과정에서도 남다른 열정을 보였습니다. 한국에 도착한 첫날부터 한국인들과 함께 생활하며 언어와 문화를 배우고자 했고, 현지인들의 생활 방식을 그대로 따르려 노력했습니다. 한국식 이름인 '두봉(杜峰)'은 그의 프랑스식 성인 '뒤퐁(Dupont)'의 발음을 한자로 옮긴 것으로, 그는 이 이름을 자랑스럽게 여겼습니다.
가난한 교회를 실천한 안동교구장의 21년
1969년부터 1990년까지 21년간 안동교구를 이끈 두봉 주교는 '가난한 교회'를 표방하며 사회적 약자들을 위한 활동에 모든 열정을 쏟았습니다^4. 그의 비전은 단순한 구호가 아닌 구체적인, 손에 잡히는 실천으로 이어졌습니다.
1973년에는 한센병 환자들을 위한 다미안 의원을 경북 영주에 설립했습니다^1. 당시 한센병 환자들은 사회적 편견과 차별로 고통받고 있었지만, 두봉 주교는 그들에게 다가가 치료와 위로를 제공했습니다. 또한 1970년에는 한국 최초의 전문대학인 상지전문학교(현 한국가톨릭상지대학)를 설립하고, 1973년에는 안동시 동부동에 가톨릭문화회관을 세워 지역 교육과 문화 발전에 기여했습니다^2.
그러나 두봉 주교의 가장 큰 관심사는 농민들의 삶이었습니다. 농촌 지역이 대부분인 교구 현실을 감안해 교구 사무국에 농민사목부를 따로 설치하고, 1978년 12월에는 가톨릭농민회 안동교구연합회를 창립했습니다^1. 1981년에는 안동농민회관을 세워 농민 교육과 권익 보호의 중심지로 삼았습니다^2.
두봉 주교가 안동교구에 남긴 발자취
두봉 주교는 안동교구장으로서 교구를 이끌며 교구 상징 문장(紋章)조차 만들지 않았습니다^2. 권위보다는 봉사에 초점을 맞춘 그의 리더십은 제2차 바티칸공의회의 정신과 맞닿아 있었습니다. 가난한 교구의 살림을 꾸리기 위해 미국, 독일, 네덜란드 등을 오가며 원조를 받아왔지만, 그 모든 것은 지역 주민들과 신자들을 위한 것이었습니다.
농민과 소외된 이들의 편에 선 용기 있는 목자
두봉 주교가 한국 사회에 깊은 인상을 남긴 것은 단순히 오래 머물렀기 때문이 아닙니다. 그는 위험을 무릅쓰고 약자들의 편에 서는 용기를 보여주었습니다.
1978년, 이른바 '오원춘 사건'이 발생했습니다. 농민들에게 불량 감자종자를 배급한 군청 측이 피해보상을 요구하는 가톨릭농민회 안동교구연합회 오원춘 분회장을 폭행한 사건이었습니다^4. 두봉 주교는 곧바로 대책위원회를 구성하고, 진실을 파헤치기 위한 전국적인 기도회를 열었습니다^4. 또한 〈짓밟히는 농민운동〉이라는 문건을 만들어 전국에 배포하며 이 문제를 공론화했습니다^2.
이러한 그의 행동은 당시 유신 정권의 심기를 건드렸고, 결국 박정희 정부는 두봉 주교에게 추방령을 내렸습니다^2. 그러나 그는 "부당하다"며 굴하지 않았고, 세계 가톨릭 여론의 힘을 등에 업고 이 위기를 극복했습니다^2. 한국인도 아닌 외국인 성직자가 권력에 저항하며 약자의 편에 선 것은 당시로서는 엄청난 용기가 필요한 일이었습니다.
두봉 주교와 오원춘 사건의 역사적 의미
이 사건은 단순한 농민 운동을 넘어 한국 천주교회가 사회 정의에 눈을 뜨는 계기가 되었습니다. 두봉 주교의 농민 사목은 한국 천주교에 새로운 방향성을 제시했으며, 이후 한국 천주교회의 사회 참여 확대에 큰 영향을 미쳤습니다.
은퇴 후에도 꺼지지 않은 봉사의 정신
1990년 12월, 두봉 주교는 정년을 15년이나 앞두고 안동교구장에서 물러났습니다^2. "한국 천주교 교구장은 한국인 사제가 맡아야 한다"는 그의 신념은 교구장 시절부터 변함이 없었습니다^2. 은퇴 후에도 그는 "교구 안에 그냥 눌러살면 후임 주교에게 짐이 된다"는 생각에 안동을 떠났습니다^2.
그러나 한국을 떠나지는 않았습니다. 경북 의성군의 작은 공소에 머물며 지역 신자들을 위해 미사를 주례하고 고해성사를 들으며 소박한 삶을 이어갔습니다^4. 90세가 넘은 고령에도 불구하고 최근까지도 바쁜 나날을 보냈으며, 안동교구 행사가 있을 때마다 참석해 지역 신자들과 함께 어울렸습니다^4.
2019년에는 특별귀화자로 선정되어 대한민국 국적을 취득했습니다^4. 프랑스와 한국의 이중국적자가 된 그는 2022년 1월 tvN 예능 프로그램 '유 퀴즈 온 더 블럭'에 출연해 많은 이들에게 감동을 주기도 했습니다^5. 이 방송 이후 멀리서 그를 찾아오거나 전화와 문자로 연락하는 이들이 많아졌고, 그는 이런 소통에도 정성을 다했습니다^5.
두봉 주교님의 유산과 우리에게 남긴 가르침
두봉 주교는 2025년 4월 10일, 뇌경색으로 입원 치료를 받던 중 96세의 나이로 생을 마감했습니다^3. 그의 장례미사는 4월 14일 안동교구 목성동주교좌성당에서 봉헌되었으며, 장지는 안동교구 농은수련원 성직자묘지입니다^4.
그가 한국에 남긴 유산은 단순히 물질적인 것이 아닙니다. 2012년 만해실천대상을 수상했을 때, 그는 상금 3천만원과 부모님의 유산까지 모두 안동교구에 기증했습니다^6. 이는 그의 안동교구 사랑이 얼마나 깊었는지를 보여주는 한 예에 불과합니다.
두봉 주교의 진정한 유산은 그가 보여준 삶의 태도와 가치관입니다. 그는 권위보다 섬김을, 화려함보다 검소함을, 말보다 행동을 중시했습니다. 71년이라는 긴 세월 동안 한국에서 봉사하며 한국인들의 아픔과 기쁨을 함께했던 그의 삶은 오늘날 우리에게 참된 봉사와 연대가 무엇인지를 가르쳐 줍니다.
두봉 주교가 우리에게 남긴 질문들
두봉 주교의 삶은 우리에게 여러 질문을 던집니다. 사회적 약자들에게 우리는 어떤 관심을 기울이고 있나요? 불의한 현실 앞에서 우리는 어떤 용기를 발휘하고 있나요? 그리고 우리의 삶은 어떤 가치를 향해 나아가고 있나요?
그의 삶을 되돌아보며, 우리는 자신을 돌아보는 시간을 가질 수 있습니다. 두봉 주교의 삶이 우리에게 영감을 주는 이유는 그가 말이 아닌 행동으로 자신의 신념을 보여주었기 때문입니다.
외국인으로서 71년간 한국에 머물며 사회적 약자들을 위해 헌신한 두봉 주교의 삶은 국적과 인종을 초월한 인류애의 모범입니다. 그의 정신은 앞으로도 많은 이들의 가슴속에 살아 숨 쉴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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